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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에서 총리까지…민주 진영 핵심 전략가 이해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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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7회 작성일 26-01-25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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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2004년 6월 30일 국무총리에 임명된 고 이해찬 민주평통 부의장이 청와대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아래)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활동시절 고 이해찬 민주평통 부의장. 사진은 1988년 3월 31일 제13대 총선에 출마한 관악구 이해찬 후보의 유세. 한겨레 자료사진

    큰 별이 지셨습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 거목이신 어른을 이렇게 버내드려 마음이 아픕니다. 고인의 명복을 기원 드립니다.

재야에서 총리까지…민주 진영 핵심 전략가 이해찬 별세

25일 별세한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던 민주화 투사이자 7선 국회의원과 국무총리를 지낸 민주개혁 진영의 대표적 정치인이었다.

재야 운동권 1세대로 1988년 정계에 입문한 이 수석부의장은 탁월한 정책·기획 능력과 특유의 카리스마로 두 차례 민주당 대표를 지냈고 김대중 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을 맡는 등 민주 진영의 핵심 전략가·조정자 역할을 했다. 이 대통령과도 인연이 깊어 2021년 대선 당시 이재명 대선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을 맡는 등 비주류 정치인 이재명이 대권주자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주요 조력자이자 정치적 조언자 역할을 했다.


1952년 7월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이 수석부의장은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하던 1972년 박정희의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과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두 번의 옥고를 치렀고, 이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서 반독재·통일운동을 했다. 1985년 대학 졸업 때까지 14년 동안 학생 운동을 이끌었던 그는 수배 시절인 1979년 출판사 ‘돌베개'를 설립하고, 1987년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출판·언론 활동에도 열정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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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석부의장이 제도권 정치에 입문한 것은 36살이던 1988년이다. 민주당의 전신으로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평화민주당에 입당해, 그해 12월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 지역구에 출마했다. 당선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김종인(민정당), 김수한(통일민주당) 등 거물급 정치인들을 꺾고 당선돼, 17대 총선까지 서울 관악을에서 내리 다섯 차례 당선됐다. 그가 의원이 된 직후 대학 후배였던 유시민씨가 보좌관으로 일했다.

이 수석부의장은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초대 교육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당시 그는 체벌·야간자율학습을 없애는 등 교육 개혁을 추진했으나, 교원정년 단축에 대한 교원들의 반발 속에 1년2개월 만에 물러났다. 이해찬 장관 때 만들어진 입시 제도로 대학에 입학했으나 학력 저하로 논란이 된 청년들에게 ‘이해찬 세대’라는 신조어가 붙기도 했다.

이 수석부의장은 특히 ‘친노무현계 좌장’으로 불리는 등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초선 국회의원 시절 노무현·이상수 의원과 ‘노동위 3총사’로 불렸던 그는 2002년 대선에서 선거기획단장을 맡아 노무현 대통령 집권에 기여했고,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을 이끌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과 맞담배를 피울 정도로 가까운 측근이었던 이 수석부의장은, 노 전 대통령이 탄핵 정국에서 복귀한 뒤 2004년 고건 전 총리에 이어 2기 국무총리로 임명돼 ‘실세 총리'로서 국정 전반을 총괄했다. 행정도시 위헌소송으로 장기간 표류하던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추진사업을 마무리했고 총리 재임 시절 대정부 질문 때 한나라당(옛 국민의힘) 의원들과 거침없는 설전을 벌이면서 ‘버럭해찬’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2006년 3월 '3·1절 골프' 파문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2009년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에는 참여정부 주요 인사들과 노무현 재단을 출범시켰다.

2012년 19대 총선 때 세종시에서 당선된 뒤 민주통합당 대표에 올랐으나, 18대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안철수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사퇴 압박을 받은 끝에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서 공천배제됐고, 탈당 뒤 무소속으로 세종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선 뒤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한 이 수석부의장은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당대표를 지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깊은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긴밀한 당청관계를 구축해 '실세 당대표'로 통했다. 2018년 전당대회 당시 "개혁 정책이 뿌리 내리려면 20년 정도는 집권하는 계획을 가져야 한다"며 이른바 '20년 집권론'을 언급했고, 2020년 21대 총선을 앞두고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 그것을 기반으로 2022년 대선에서 재집권함으로써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오는 100년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 수석부의장은 ‘독선적’ ‘불통’이라는 평가와 동시에 리더십, 추진력, 소신이 강하다는 평가도 함께 받는다. 2007년 출간한 자서전 ‘청양 이 면장 댁 셋째 아들 이해찬’에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정치 스타일에 대해 “나는 개량주의자이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오가는 불성실하고 불철저한 근본주의자보다는 성실하고 철저한 개량주의자가 사회의 진보에 훨씬 더 기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고 밝혔다.

스스로를 ‘개량주의자’로 평가한 이 수석부의장은 실용주의를 앞세운 이재명 대통령의 정치적 성장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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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당시 경기지사였던 이 대통령이 도덕성 논란 등으로 제명·탈당 위기에 처했을 때 이 전 총리가 이를 물밑에서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대선 당시 이재명 대선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을 맡았고, 2024년 총선에서는 민주당 상임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승리를 뒷받침했다.

그는 2021년 12월 티비에스(TBS) 인터뷰에서 “당대표가 돼 (이재명 당시) 경기지사하고 정책협의회를 많이 해보니까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제대로 우리 사회를 잘 알고 있구나’ 하는 것을 그때 많이 느꼈다”며 “발전도상인이라는 말이 적절한 표현이다. 자꾸 발전하는 사람”이라고 당시 이 대통령을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제22기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에 임명돼 이재명 정부의 대북·통일 정책 입안을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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