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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청산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3-03-13 (수) 22:47 조회 : 971


작성일 : 08-06-07 18:00
글쓴이 : 유럽포커스  조회 : 2,392 
나치즘에 대한 독일의 역사청산

인류역사를 전쟁, 폭력, 불의 등 악의 연속이었다고 본다면 역사에 대한 비판적인 청산작업은 좀 더 정의로운 사회로의 발전을 위해 역사의 진행과 병행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청산이라는 반성이 따르지 않는 역사는 부정적 역사의 반복을 묵인하며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독일은 20세기에 들어와 두 차례에 걸친 독재정권을 겪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독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청산은 독일만의 특수성이 아닌 현대사의 대표적인  ‘역사청산의 본보기’ 고 볼 수 있겠다. 통독 후 동독정권 40년에 대한 청산작업이 아직도 학계활동을 제외하고는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아마도  동독역사에 대한 심도 있는 청산과정은 앞으로 긴 시간을 요하는 장기적 과제인 듯 하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50년이 지난 지금 나치즘에 대한 청산작업은 아직까지 독일사회를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끌어넣고 있으며 열띤 논쟁대상이 되고 있다. 이 원인은 나치정권이 집권 13년간 동안 행한 비인륜적 만행이 간단히 시간과 함께 잊혀질 수 있는 규모를 벗어난다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와 비교해 본다면 구소련의 경우 언론인, 역사학자 등이 스탈린주의가 50년이 지났다는 시간적 흐름을 놓고 역사청산에 미온적이라는 사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지난 2년만을 돌이켜 보아도 과거사를 규명하려는 독일사회의 참된 노력은 승전 자에 의해 주도되었던 2차대전 직후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시기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적극적이며 진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요즘 독일에서의 역사청산작업은 다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적 측면에서는 정확하고 철저한 자료조사가 이루어지고 법적측면에서는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이 따르며 도덕적 차원의 물음을 통해 개인이나 집단 혹은 사회의 책임감, 속죄의식을 상기 시키려는데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치적으로 계속 국민에게 교육과 계몽, 자기반성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역사오류의 반복을 방지해야 한다는 의지가 배후에 숨어 있다. 특히 도덕적 차원의 속죄과정은 사회각계에서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평생 저축한 거액의 금액 6억원을 속죄의 뜻에서 이스라엘에 희사한 베를린의 한 소시민, 1970년 폴란드 방문시 나치에 대한 항거와 반항운동에서 희생된 유대인 및 폴란드 시민의 위령탑에 무릎을 끊고 묵념으로 속죄의 뜻을 표시한 사민당의 브란트 수상, 현재 독일에서 계속되고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설립에 대한 논의 등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에서 독일사회에서 96년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과거청산작업과 관련된 구체적인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해 본다.

전범자에 대한 재판

나치전범자에 대한 군사재판에 49년까지 있은 후 50년대 말 공식적으로 나치범죄추적담당기관이 설립돼 지금까지 1300명이 법적 징벌을 받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근래에 독일의 관심을 끌었던 사건은 이태리법정이 이태리민간인 3백여 명을 학살한 독일인전범자를 시효소멸이란 이유로 석방함으로서 국내외에 큰 분노를 자아내게 했던 판결이었다.
이제 전범자들은 80대, 90대가 되었다. 전범자 징벌이 이와 같이 긴 세월을 끌게 된 데는 독일법조계에는 나치시대 법조인이 그대로 법조계요직을 물려받았다는 데도 일부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는 언제까지나 전범자추적은 계속돼야 한다는 단호한 결의표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최근에도 일부 주정부에서는 다시 한번 이러한 의도를 공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국에서만도 97년도에 300명 이상의 나치 전범자에 대한 미국적 박탈여부가 심사되리라는 보도만 보아도 이 전범자처리문제의 복잡성을 잘 알 수 있다.


한 도시에 세워진 희생자 위령묘

독일 도시 중에서도 프랑크푸르트는 금융 상업도시라는 이유 때문에 과거부터 현재까지 특히 유대인과의 관계가 깊은 도시이다. 나치시대 이 도시 거주 유대인중 집단수용소로 수송되어 살해당한 희생자수는 1만 1천여 명에 달했다. 수년전 이 도시 시내 공사장에서는 우연히 중세기 유대인의 주거중심지가 발굴되었다. 역사적으로 프랑크푸르트에 유대인 집단거주지다 있었다는 기록은 있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시당국에서는 이 유적지를 어떻게 해서 교훈적인 유물로 보존할 것인가에 대해서 수년간에 걸쳐 기획을 하였다. 이 과정에는 유대인협회, 사회단체 등이 격렬한 논쟁을 벌이면서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결국 이 장소에 속죄를 상징하는 묘지를 세우기로 결정됐다. 이 설계를 위한 공모전이 있었는데 대학재학생들의 작품이 당선작이었다. 설계도에 따라 건립된 이 집단묘소는 매우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300메터에 달하는 담벼락이 묘소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부터 이색적이다. 역사의 유물인 유대인지역 건물유적에서 파낸 돌을 주 자료로 해서 세워진 담벼락에는 이 도시출신 희생자 11.134 명 전원에 대해 각자 성명, 출생일과 사망일이 새겨진 작은 금속네모꼴 11.134개가 박혀 있다. 그러나 대부분 희생자는 사망일조차 기록이 불가능하다. 나치시대 20개가 넘는 집단수용소가 널리 흩어져 있었고 여기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사망일조차 알 수 없는 처참한 마지막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 위령묘소 주변에는 검은색 자갈이 깔려있다. 발로 밟을 때마다 각진 돌과 돌이 짓눌려서 아픔을 호소하는 듯한 불화 음을 내고 있다.

한 고등학교의 역사 청산

프랑크푸르트 소재 레씽고등학교 강당에는 40년간  이 학교졸업생 선배 사진 한 장이 걸려있었다. 최근 이 학교 학생들은 역사시간에 이 사진을 이 자리에 걸어 놓을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 사진의 주인공은 2차대전시 군 장성으로 활약했는데 전쟁종료 약 1년 전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여 처형된 장교그룹에 속했다. 그러나 그는 반히틀러운동에 가담하기 전, 프랑스점령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점령지 민간인에 대한 보복조치 등 가혹행위에 참가했었던 것이다. 그는 군인으로서 독재에 항거하는 용기를 보여주었으나 결국 용감성과 기회주의자적인 단면, 도덕성과 비도덕성을 지닌 이중적인 인물이었다고 평가됨으로써 학생들이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전체주의체제 하의 사회상은 50년이 지난 현재 후세들이 서술하고 상상하는 것 보다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학교당국과 학생들은 정치가, 사회단체, 역사가 등 외부인사들을 초청하여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결국 학생들의 타협안에 의해 사진 옆에는 그가 프랑스에서 사령관 재직 시 내렸던 발포명령과 이 사건을 보는 역사가들의 견해를 함께 걸기로 하였고, 이와 별도로 이 학교재학생중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가 희생된 재학생들의 기념비도 세우기로 결정되었다.

독일의 역사청산을 재조명한 Goldhagen 의 논문

지금까지 나치범죄를 놓고 역사가들이 던지는 질문은 ‘도대체 어떻게 유럽의 전통적인 문화민족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는가’ '꼭 독일에서 이런 범죄가 생긴 이유는 무엇인가‘ ’반유대인감정의 원천은 어디서 찾을 수 있나‘ 등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주제를 다룬 저서는 전후 수없이 많았다.
전쟁 직후 역사가들은 모든 책임을 히틀러와 맹신적인 그의 추종자에게 돌렸으며 70년대에는 히틀러집권체제 내부조직의 특수성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작년에 위의 질문에 대해 새로운 답변을 제시하는 저서가 나오면서 다시 역사논쟁이 벌어질 계기가 생겼다.  이 도화선이 된 저서는 유대계 하바드대학 학자의 박사논문에 기초한 저술인데 도대체 독일에서 이정도로 사회의 관심을 야기한 책자는 흔치 않았다. 저자의 주장하는 핵심은 나치들의 만행이 독일에서 가능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독일인의 의식 속에는 독일인 특유의 반유대감정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일부 집권자의 반유대감정이 살인을 유발하게 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 뿌리를 둔 대부분 독일인의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 반유대감이 유대인 학살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주장이었다.
저자는 독일인은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살인행위에 자발적으로 동조, 참여했다고 서술하면서 독일인에 대해 ‘연대책임’을 물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역사해석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홀로코스트를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그만큼 사회각계의 반응도 격렬했다. 십자군 원정 시 유대인학살, 마르틴 루터의 반유대적 선동, 남부유럽, 동부유럽에서의 유대인학살, 근래 소련내부에서의 반 유대감정 이 보여주듯이 기독교문화에 기인한 반 유대감정을 독일인 특유의 성격 내지 독일적 문화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구속력이 없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특히 역사학계에서는 또 다른 시각에서 격렬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즉 이 저서는 역사적 상황의 과장된 일면에서 추리된 결론으로 인해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복잡한 사회, 역사적 연관성을 극도로 단순화하여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데 비난의 초점이 쏠리고 있다. 하바드대학 정치학부에서 우수학위논문으로 수상된 이 저술에 대해 심지어 이스라엘에서도, 상품화된 저질작품이라고 평가하며 독일인 전체를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국민으로 보려는 흑백논리는 마치 나치들이 유대인에 가한 평가와 다를 바 없다는 혹독한 논평도 있었다. 작년에 이 저자가 또 한번 물의를 일으킨 것은 확실히 학자로서의 그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키는 사건이었다. 그의 작품을 비판한 캐나다 학자에게 그는 변호사를 통해 법적으로 문제 삼겠다고 협박하고 나섰다. 비판을 수용해야 하는 학자로서의 기본자세가 그에게 결여되어 있음은 물론이지만 이 배후에는 미국식 장삿속에서 PR전문가가 있으리라는 평이다. 이와 같이 사회와 학계가 찬반 양진 영으로 갈라진 견해 차이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저서가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앞으로 과거사에 대한 새로운 논쟁과 연구를 유발하게 되리라는 이유 때문이다. 독일의 과거청산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관심을 끄는 것은 저자 골드하겐이 직접 5대도시에서 개최한 토론회에 참석했는데, 이 관중들은 저자에게 적극적인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정신적인 지원을 표명했다는 점이다. 또한 전후 50년이 지난 현세대 지식인들의 역사청산에 대한 깊은 관심도와 저자의견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은 전후 독일사회의 성숙도와 역사의 오점에 대한 속죄의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나치 군대도 살인자?

나치군부가 유대인학살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었으며, 구체적으로 여기에 참여했는가 하는 문제는 전후 계속 논의된 것이 사실이다. 골드하겐도 결국 같은 질문을 독일국민 전체에게 적용시켰고  자신이 이 질문에 대해 최종적인 해답을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치군부의 경우도 결국은 군부라는 다른 집단에 대해 같은 내용의 질문을 던지면서, 이를 전 국민에게 알린다. 는 목적 하에 전시회가 벌어지고 있다. 한 사회문제연구소가 주최하는 이 전시회의 명칭 “Vernichtungskrieg. Verbrechen der Wehmacht"(섬멸전. 나치군부의 범죄행위) 이 말해주듯이 이 전시회에 수집된 사진은 고위 군부 층이 적극적으로 학살에 참여했다는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모든 군인이 다 참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이 전시회는 1년 전부터 전국 각도시를 순회하고 있다. 전시회 자체의 의의에 대해서는 가는 곳마다 격렬한 찬반론이 대두되고 있다. 지난 2월 동독지역에서는 이 전시회를 계기로 극우, 좌파가 거의 규모의 데모대를 동원 시위를 벌려 사회를 긴장시키기까지 했다.
또 한가지 역가청산과 관련 지적될 사항은 독일이 아직도 나치법정판결을 무효화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월에는 독일 12개 연방주가 주동이 되어 나치 판결 중 정치, 인종, 사상에 근거하여 내려진 판결을 무효화시키기 위한 법령제안을 준비 중이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기 전까지는 4가지 범죄에 대해 사형언도가 가능했는데 나치 하에서는 이 숫자는 46가지로 증가했다. 1945년 초에는 즉결군사재판이 형성되어 전쟁종말시까지 탈영병을 총살하는 발악을 하였다. 살아남은 탈영자는 아직도 법적으로 탈영병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 것이다. 복권 법은 각주마다 제각기 상이하다. 이러한 법률개정 움직임에 대해 3개보수 주정부에서는 아직도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이상 구체적인 예에서 보듯이 독일의 역사청산은 다각도로 이루어져 왔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이며 항시 되풀이되는 표어는 ‘과거를 잊지 말자’ 는 것이다. 나치범죄를 전적으로 부인하려는 신나치들도 준동하고 있으나 신세대가 조상들이 저지른 부정적인 역사의 단면을 망각하지 않도록 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은 양식 있는 인사들에 주어진 주요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마땅히 아직도 전쟁범죄를 부인하고 이를 합리화하려는 일본정치가들과의 대조를 보게 된다. 대외적인 국제사회에서의 명예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골적인 반역사적 언행을 일삼는 일본에 대해 국제적인 여론을 조성하며 이에 적극 대응하지 못하는 한국정부의 태도는 유럽국가의 양식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이유를 우리는 오히려 우리자신에게 역사에 대한 청산의식이 결여된 데서 찾아 볼 수 있지않을까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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